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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에서 새로운 형태로 — 정소현과 김수진

2026.09.08

“제약은 어떻게 새로운 형태가 되는가”

〈붕어〉의 정소현, 〈ST 페이즈〉의 김수진(센치타입)

2026년 AG Font에 새로 입점한 디자이너들을 만납니다. 이번 주인공은 〈붕어〉를 만든 정소현과 〈ST 페이즈〉를 만든 김수진(센치타입)입니다. 두 사람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글꼴이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글꼴을 만드는 일에는 늘 조건이 따르지만, 이 제약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이전에 없던 형태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제약 속에서 자기만의 형태를 찾아간 두 디자이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 과정을 따라가 봅니다.

글꼴 디자인의 시작

Q. 어떻게 글꼴 디자인을 시작했나요?

정소현 글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통령 선거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면서였어요. 후보 이름의 로고타입과 기호 숫자를 함께 다루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저도 일부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름과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서 공간과 무게를 어떻게 나눌지 처음 고민했어요. 한글과 숫자는 뼈대가 달라서 그냥 옆에 두면 한쪽이 뜨거나 눌렸고, 크기와 굵기를 미세하게 맞춰야 했습니다. 획 하나의 각도만 바꿔도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글자를 다룬다는 건 형태를 그리는 일이라기보다 형태와 형태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요.

김수진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들으며 여러 글꼴을 접했고, 자연스럽게 글자에 관심이 생겼어요.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처음 조합형 글꼴을 만들어 봤는데, 제가 정한 형태와 규칙으로 수많은 글자를 만들어 한 벌을 완성하는 과정이 무척 새로웠습니다. 직접 한 벌을 만들고 나니 이 일을 더 오래, 더 깊이 하고 싶어졌어요. 산돌과 디자인210에서 기업 전용서체와 상용 글꼴을 디자인했고, 지금은 센치타입이라는 이름으로 타입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합니다.

인상을 만드는 작은 차이

Q. 글꼴을 만들 때 줄곧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이 있나요?

정소현 브랜딩과 그래픽 디자인을 주로 해 와서 본문용보다 제목용 글자에 마음이 갔어요. 묵직하고 존재감이 강한 글자요. 〈광인〉과 〈붕어〉는 인상이 정반대지만 출발 질문은 같았습니다. 굵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읽히는 글자를 만들 수 있을까. 획이 두꺼워질수록 어려운 건 균질함이에요. 획이 적은 글자는 헐렁해지고, 획이 많은 글자는 꽉 막힌 덩어리가 되기 쉽거든요. 결국 획을 어디까지 굵게 가져갈지는 속공간이 정하는 문제였어요. 속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획끼리 부딪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덜어내고, 합치고, 묶는 미세한 감각에 집중했습니다.

김수진 저는 글자 형태에서 오는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같은 내용도 어떤 글꼴로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니까요. 익숙한 형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작은 변화라도 새로운 인상을 주는 시도를 해 보고 싶어요. 자소(자음과 모음 낱개)의 크기, 획의 형태, 글자 안 공간을 조금씩 바꾸며 그 글꼴에 어울리는 모습을 찾아갑니다. 작은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개성이 드러나는 쪽을 좋아해요. 그 특징이 몇몇 글자에만 머물지 않도록 여러 글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한 벌 전체에 고르게 이어지도록 다듬습니다.


〈붕어〉 — 형태를 옮기는 일에서 인상을 옮기는 일로

Q. 〈붕어〉는 어디에서 시작된 글꼴인가요?

정소현 어떻게 보면 미련에서 시작됐어요. 활자공간에 대표적인 라틴 서체를 한글로 옮겨 보는 ‘활자번역’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거든요. 평소 좋아하던 〈Cooper Black〉을 한글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남아 따로 시작했습니다. 〈Cooper Black〉이 제빵회사의 유명한 광고에 사용됐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름도 붕어빵에서 가져왔습니다. 친숙하고, 소리 내기 부드럽고, 통통한 형태가 서체의 인상과도 맞았고요. 처음엔 〈Cooper Black〉의 특징적인 형태를 자소 단위에서 최대한 닮게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형태를 따라갈수록 한글의 모아쓰기와 맞지 않는 지점이 계속 생겼습니다. 결국 작은 단위의 형태를 옮기기보다 전체 인상을 옮기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번역에서 출발했더라도 자기 이름과 성격을 가진 한글 서체이길 바랐습니다.

Q. 〈Cooper Black〉에서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새로 만들었나요?

정소현 두꺼운 획, 큰 몸집, 획이 동글고 통통하게 부푸는 표현처럼 인상을 만드는 큰 요소를 가져왔어요. 〈Cooper Black〉은 엑스하이트(소문자 높이)가 높아 글자마다 부피가 꽉 차 보이는데, 한글에서는 네모틀을 최대한 채우는 쪽으로 풀었습니다. 소문자 ‘u’의 아랫부분 형태는 ‘ㅁ’, ‘ㅂ’ 같은 자음 아래쪽에 적용했고, ‘o’의 기울어진 속공간도 한글로 가져왔어요. 반대로 그대로 가져올 수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라틴은 글자 하나에 특징적인 형태 하나가 드러나도 괜찮지만, 한글은 자소 두세 개가 한 칸에 모이잖아요. 장식적인 특징을 그대로 넣으면 모음과 부딪히거나, 받침까지 더해졌을 때 너무 빽빽해졌어요. 그래서 자소 단위의 특징은 상당수 덜어냈습니다. 재미있는 건 〈붕어〉의 라틴이에요. 원본이 라틴인데도, 오히려 한글에서 만들어진 특징을 라틴이 따라가도록 그렸어요. 세리프, 획 굵기, 속공간의 방향을 〈붕어〉 한글에 맞춰 다시 정리했습니다. 한글에서 정한 규칙을 라틴에 되돌려 준 셈이에요.

크고 통통하지만 가볍게

Q. 〈붕어〉를 만들며 가장 오래 고민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정소현 〈Cooper Black〉 특유의 무게감을 옮기는 일이 가장 어려웠어요. 획은 굉장히 굵고 묵직한데 조판해 보면 이상하게 가볍게 느껴지거든요. 저는 크고 푹신한 베개 같다고 생각했어요. 〈붕어〉에서도 크고 통통하지만 가벼운 인상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ㅁ’, ‘ㅂ’, ‘ㄹ’ 같은 자음의 아랫부분을 둥글리고 부리와 맺음도 통통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무게만 더해질 뿐 가벼운 리듬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받침이 붙으면 글자가 베이스라인에 온전히 붙어 바닥에 눌린 것처럼 보였어요.

결국 답을 형태가 아니라 글자가 바닥에 닿는 방식에서 찾았습니다. 가로획으로 끝나는 ‘ㄴ, ㄹ, ㅂ, ㄷ, ㅌ’ 받침의 아래를 둥글게 굴려, 가장 낮은 한 점만 살짝 베이스라인에 닿게 바꿨어요. 선이 아니라 점으로 닿는 셈이죠. 그 작은 차이로 글자가 바닥에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이 생겼고, 조판했을 때 리듬도 살아났습니다. 획은 두껍게 가져가면서도 가벼워지는 길을 그렇게 찾았어요. 초기에 그렸던, 받침이 베이스라인에 온전히 닿는 형태도 버리지 않고 스타일 세트(대체 글자 묶음)로 남겨 뒀습니다. 어느 쪽이 틀린 게 아니라 쓰임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Q. 완성된 〈붕어〉의 특징이 잘 드러난 사례가 있나요?

정소현 최근 그린나래미디어가 수입한 영화 〈너바나 더 밴드…〉의 제목에 〈붕어〉가 쓰인 것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제목에 받침 없는 글자가 많아 〈붕어〉의 둥근 아랫부분과 가벼운 인상이 잘 드러났고, 영화의 유쾌하고 따뜻한 정서와도 맞았습니다. 원작 포스터의 〈Cooper Black〉과 나란히 놓였을 때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붕어〉의 출발점과 지금 모습을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출처: 그린나래미디어(주), 빠더너스 BDNS


〈ST 페이즈〉 — 제한된 단위에서 시작된 변화

Q. 〈ST 페이즈〉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김수진 한글을 일정한 그리드 안에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 보는 작업에서 시작했어요. 그리드에 맞춰 글자 구조를 정리하다 보니 픽셀 특유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고, 이 방식을 글꼴 한 벌로 발전시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형태를 만들어 보려던 작업이, 이어 가다 보니 픽셀이라는 제한된 단위 안에서 다양한 조형을 찾아가는 작업이 됐어요.

또렷함과 픽셀다움 사이

Q. 픽셀이라는 조건 안에서 가장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김수진 픽셀 폰트다운 특징을 살리면서 글자를 얼마나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였어요. 정해진 그리드 안에서 픽셀 단위로 형태를 만들다 보면 획이 서로 붙거나 자소의 경계가 흐려지기 쉽거든요. 그래서 클래식한 비트맵의 인상을 위해 꽉 찬 네모꼴을 기본으로 하되, 자소 사이 간격과 속공간은 충분히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리드 규칙 때문에 글자마다 여백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더라도, 공간을 억지로 채우기보다 자소가 분명히 구분되는 쪽을 택했어요.

Q. 그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어디인가요?

김수진 획과 획이 만나는 부분을 봐 주시면 좋겠어요. 형태에 따라 가로획과 세로획이 맞닿는 자리에서 픽셀 하나를 의도적으로 비웠습니다. ‘ㅈ’, ‘ㅊ’, ‘ㅎ’의 꼭지나 일부 모음에서 잘 보이는 특징이에요. 한 칸을 비우니 맞닿아 있던 획이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글자 인상이 훨씬 또렷해졌어요. 처음엔 글자를 잘 구분하려는 선택이었는데, 하다 보니 비어 있는 한 칸이 오히려 픽셀 하나하나의 존재감을 살려 주더라고요. 픽셀을 더해 형태를 만드는 것만큼, 어디를 비워 둘지 정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하나의 구조에서 네 가지 인상으로

Q. 같은 원리를 네 가지 스타일로 확장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김수진 픽셀이라는 제약 안에서 더 다양한 조형을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같은 구조 안에서 어디까지 다른 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거든요. 한 스타일을 완성하고 나니 다른 형태도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렇게 Square, Edge, Flow, Round 네 가지로 확장했습니다. ‘페이즈(Phase)’라는 이름도 하나의 형태가 단계적으로 변한다는 뜻에서 지었어요. 네 스타일은 기본 구조와 비례를 공유하지만 형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요. Square는 사각형을 중심으로 반듯하고 단단하게, Edge는 모서리와 획 끝에 날카로운 변화를 주었습니다. Flow는 곡선과 획의 연결로 유연한 흐름을 만들었고, Round는 원형을 중심으로 둥글고 부드럽게 풀었어요. 각 스타일의 개성이 분명하면서도 한 패밀리로 어우러져, 픽셀만으로 글자가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작은 차이가 전체의 인상이 될 때

두 글꼴이 마주한 제약은 달랐습니다. 정소현은 〈Cooper Black〉의 인상을 모아쓰는 한글로 옮기며 굵은 획과 좁아지는 공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고, 김수진은 픽셀 그리드 안에서 글자 구조를 얼마나 선명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로 작은 데 있었습니다. 〈붕어〉는 받침이 바닥에 닿는 선을 한 점으로 바꾸었고, 〈ST 페이즈〉는 획이 만나는 자리의 픽셀 한 칸을 비웠습니다. 이러한 작은 차이는 한 글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반복되고 확장되며 한 벌을 움직이는 규칙이 되고, 결국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글꼴의 인상이 됩니다. 제약은 만들 수 있는 형태의 범위를 좁히지만, 동시에 무엇을 달리 볼 것인지 묻습니다. 〈붕어〉와 〈ST 페이즈〉는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여 하나의 글꼴이 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붕어〉 글꼴 보기 →
정소현 · @toyom.or.tyom

〈ST 페이즈〉 글꼴 보기 →
김수진(센치타입) · @senti_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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