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의 흔적을 찾아가다 — 노은유
2026.10.05“최정호의 흔적을 찾아가다”
글꼴 디자이너이자 연구가, 노은유

노은유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글꼴 디자이너, 다른 하나는 글꼴 연구가다. 오래전 우연히 최정호라는 이름에 호기심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그의 원도와 작업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그 연구는 자신의 글꼴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6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AG 최정호체〉가 Pro 버전으로 확장 출시된다. 이번 Pro 버전의 감수를 맡은 노은유에게 최정호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실제 원도를 마주했을 때의 기억, 오랫동안 글자를 관찰하며 발견한 것들, 그리고 지금 다시 최정호를 바라보는 이유를 물었다.

— 어떻게 최정호 선생님을 알게 되었나요?
대학교 4학년 편집 디자인 수업에서 디자이너가 자주 쓰는 글꼴을 조사한 적이 있어요. 선배 디자이너들을 만나 어떤 글꼴을 주로 쓰는지 물었는데, 거의 대부분 SM 글꼴을 쓴다고 했죠. 완성도가 높고 회색도(문단에서 느껴지는 글자의 시각적 농도)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최정호 선생님의 원도를 바탕으로 했으니까 좋다는 이야기가 늘 따라왔어요. 설문조사를 하면서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최정호 선생님이라는 인물에 처음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 뒤로 글꼴 회사를 방문하거나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어요. “최정호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최정호 선생님의 원도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런데 누구도 명확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어요. 원도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요.
최정호 선생님은 마치 구전 설화 속 인물처럼 느껴졌어요. 명조체와 고딕체의 기본적인 형태가 최정호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데 이렇게나 자료가 없구나 싶었죠. 그런 의문을 가진 채 시간이 흘렀고, 박사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중 날개(안상수)를 통해 최정호 선생님을 다시 마주하게 됐어요. 자료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정호 선생님을 논문 주제로 삼는 데 고민이 많았어요. 지금은 최정호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아는 이도 많고 자료도 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다 2011년 날개를 통해 애플 아이폰을 위한 한글 글꼴 연구 프로젝트를 하며 최정호 선생님을 다시 다루게 되었고, 그때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최정호 선생님은 내가 꼭 넘어야 할 산이다.’

— 최정호 선생님의 원도를 실제로 봤을 때 어땠나요?
원도를 보기 전에는 어떤 편견이 있었어요. 늘 쓰던 명조체와 원도는 얼마나 다를지, 뭐가 다를지 비교하고 분석할 생각에 기대가 컸어요. 그런데 막상 원도를 보니까 정말 똑같아서 감동적이면서도 허무하고, 당황스러웠어요. 예스러운 느낌도 전혀 없고 모던하고 현대적이었어요. 특히 모리사와 원도는 정말 깨끗해서 군더더기가 없고, 지금의 명조체보다 오히려 또렷하고 날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리사와 HAB중명조 원도, 1972 / 모리사와 소장
—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발견한 최정호 선생님 글자만의 특징이 있나요?
낱글자 단위로 완성된 형태를 이룬다는 점이요. 요즘에는 한글을 조합형으로 많이 다루다 보니, 여러 요소가 조합되는 방식에서 형태적 특징이 드러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최정호 선생님의 글자는 마치 짜맞춘 가구 같아요. 낱글자 하나를 하나의 그림처럼 보니까 전체적인 보정이 적극적으로 되어 있어요.
초특태고딕이 그 특징을 잘 보여줘요. ‘빠’에서 ㅃ을 처리한 방식을 보면 가로획과 세로획의 두께가 반전되어 있어요. 저는 이게 뒤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보정하기 어렵다고 늘 생각했는데, 최정호 선생님은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보정한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어요.

초특태고딕 원도, 1985 / 세종대왕기념관 소장
— 복각 작업을 하다보면 원도의 의도를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도 생길 텐데요. 그럴 때는 어떻게 판단하나요?
저는 〈AG 최정호체〉 프로젝트 초기에 참여했는데, 그때는 제 해석을 적극적으로 넣으려 했어요. 그랬더니 최정호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더라고요. 가끔 ‘이거 이상한데?’ 싶어서 고쳐놓으면, 고친 게 더 이상한 거예요.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다듬고 보니 작게 봤을 때 기우뚱하더라고요. 그제야 ‘그렇게 그린 이유가 있었겠구나’ 싶었어요.
이번 감수 과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받침이 있는 섞임모임꼴에서 홀자의 이음보가 급격하게 짧아지는 부분도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걸 없애면 그 맛이 안 나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일관되게 나타난다면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 형태를 가져가는 거죠.
원도에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일차적으로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없앴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아직 모르니까요. 만약 실수라고 하더라도 확신할 수 없다면 일단 옮기는 거죠. 섣불리 고치면 오히려 일관성 없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출시할 때는 원전을 따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후에 조금 더 무르익었을 때는 사용성이나 새로운 용도를 고려해 재해석할 수 있겠죠. 〈AG 최정호 스크린〉이 화면용 글꼴이라는 명확한 기준에 따라 재해석한 것처럼요.

최정호체 원도, 1988 / 안상수 소장
— 〈AG 최정호체〉 Pro로 확장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확장 작업에서는 필요한 글자를 채워 넣는 것이 큰 목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주 쓰지 않는 글자에 대한 어색함의 기준을 잡기가 어려워요. 기존 2,576자는 늘 보던 글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이 있지만, 그 밖의 글자들은 평소 자주 보지 않으니 이상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거든요. 보통은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 보면서 판단하는데, 애초에 문장을 짜기 어려운 글자들도 있으니까요.
— 그 ‘어색함’의 기준은 뭘까요?
‘익숙함’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죠.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네요. ‘한’ ‘영’ 같은 글자를 외국인이 그리면 꼭 다르게 그려요. 한글의 받침 위치가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데, 외국인이 그린 글자에서 꼭 티가 나는 곳이 받침 위치거든요. 그런데 한글을 쓰는 사람은 아는 어떤 위치가 있어요. 관습이라고 해야 할지,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거든요.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 책을 작업할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헬무트 슈미트가 『타이포그래피 투데이』의 한글 제목을 직접 그렸는데, 제 눈에는 정말 어색하게 보이는 거예요. 날개에게 말씀드렸더니 “좋은데?”라고 하시면서, “이건 헬무트 슈미트라는 사람이 보는 한글이지 않느냐. 그냥 그대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때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한글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았죠.

『타이포그래피 투데이』 헬무트 슈미트 지음, 2010, 안그라픽스
— 최정호라는 인물이 오늘날 다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화면의 한계 때문에 최정호 선생님의 글자가 노이즈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제는 종이와 화면의 경계가 많이 흐려졌죠. 세로쓰기를 구현하기 어려웠던 환경에서 글꼴이 가로쓰기용으로 발전해 온 흐름도 있었는데, 이제는 세로쓰기 구현도 가능해졌고요. 과거의 활자나 기술을 다시 들여다보는 흐름 속에서 최정호 선생님의 작업도 자연스럽게 다시 주목받는 것 같아요. 요즘 세대의 글꼴 디자이너들이 최정호 선생님의 형태를 힙하고 모던하고 쿨하다고 느끼는 지점도 있는 것 같고요.
— 최정호 선생님을 연구한 경험은 자신의 글꼴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보정해야겠다는 것이요. 글자를 그리다 보면 작게만 보다가 크게 봤을 때 어색한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히 최정호 선생님은 글자를 주로 작게 쓰던 시대에 작업했잖아요. 그때는 9포인트면 9포인트만 보고 달린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요즘은 다양한 크기를 다 봐야 해요. 그런데 크게 보는 용도에 맞추면 작게 봤을 때는 확연한 단점이 되기도 해요. 적극적으로 보정된 최정호 선생님의 글자를 보면서, 작게 봤을 때 맞춘 것이 크게 봤을 때 어색한 건 어쩌면 특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결국 조금 더 작은 크기, 혹은 가장 많이 쓰이는 크기를 기준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고 모든 크기를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무엇을 우선할지 글자를 만들기 전에 정해두면 판단하기도 좋아지고요.

— 최근 노타입 공간을 열면서 예전 연구도 다시 꺼내보고 있다고 들었어요.
노타입 공간이 생기면서 여기저기 쌓아뒀던 연구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최정호 선생님에 대한 연구를 다시 꺼내보게 되었어요. 잊고 있던 제 연구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 같고요. 이곳에서 워크숍과 크릿을 진행하면서 제 연구 자료도 공유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도 많은 영감을 받고 있어요. 더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음 작업도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관심 있던 주제라 그동안 자료만 모아왔는데, 최근에는 조금 더 속도를 내서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던 당시에는 자료도 부족했고 이야기를 함께 나눌 기회도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배우고 나누는 활동을 많이 해보려고 해요. 글자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저도 듣고 싶어요. 이런 것을 함께 나누는 게 가장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노타입에서 하는 모든 것을 강의라기보다 스터디라고 생각해요.